페다고노트

누구나 지식과 아이디어를 나누는 공간

컬럼/에세이

지우지 않은 선

한지우
2026-09-19 14:46 5

토요일 점심 무렵, 애월 작업실 책상에서 김 선생님의 인물 드로잉을 열었어요. 3기 피드백 창 옆에는 식은 커피가 있었고, 손은 자꾸 태블릿 펜으로 갔어요. 눈 위치에 비해 턱이 조금 길어 보였거든요.

예전 같으면 새 레이어를 만들었을 거예요. 눈썹과 코끝, 턱 아래에 가로선을 긋고 제가 맞다고 생각한 턱선을 진한 색으로 얹었겠지요. 빠르고 친절해 보이는 방식. 저도 답을 다 한 기분이 들고요.

그런데 그렇게 고쳐 준 그림은 다음 그림에서 다시 흔들리는 일이 많았어요. 수강생은 제 선까지 정확히 따라왔지만, 어느 간격을 보고 얼굴이 길다고 판단했는지는 남지 않았어요. 피드백을 많이 쓴 날일수록 제가 대신 그린 부분도 많았고요. 이건 좀 이상했어요.

오늘은 펜을 들었다가 내려놨어요. 그림 위에는 눈과 턱을 잇는 빈 공간에 작은 점 두 개만 찍었어요. 그리고 “얼굴 안에서 가장 길어 보이는 거리가 어디인지 먼저 찾아볼까요”라고 적었어요. 턱을 올리라는 말은 쓰지 않았어요. 원래 선도 지우지 않았고요.

이 방법이 늘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질문이 너무 넓으면 막막하다는 답도 받아봤거든요. 그래서 표시를 전혀 안 하기보다 시선이 머물 자리를 아주 작게 남겨요. 표시 하나와 질문 하나. 고칠 곳이 여러 군데 보여도 첫 답장에는 한 거리만 봐요. 저도 이걸 자주 못 지켜요. 피곤하면 정답선부터 긋고 싶어져서…

창밖 빛이 책상 모서리에 얇고 희게 걸렸어요. 김 선생님이 어떤 선을 옮길지는 아직 몰라요. 수정본이 오면 완성된 턱선보다 처음 선을 지우지 않고 옆에 남겨두었는지 먼저 보려고 해요. 옮긴 이유도 한 문장으로 물어볼 생각이고요. 그 흔적이 다음 얼굴을 볼 때 쓸 눈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조금만 더 기다려봐요.

한지우

페다고노트 작가

구독자 0 게시글 1
한지우

댓글 1개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정수빈 2026-09-19 16:14

표시 하나와 질문 하나가 남았습니다. 저도 첨삭하다 피곤하면 학생 문장 대신 정답 문장을 써주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다른 게시물

그림책 서점에서 두 시간을 보냈다

지난 토요일 오후, 동네 그림책 서점 문을 밀고 들어가니 작은 의자 하나가 비어 있었어요. 조카에게 줄 책 한 권만 고를 생각이었는데, 가방을 내려놓을까 하다가 그냥 멘 채로 책장 앞에 섰어요. 처음 꺼낸 건 짙은 파란색 표지였고, 그다음은 주황색 고양이가 그려진 책이었어요. 몇 권만 훑어볼 참이었는데 시계를 다시 봤을 때는 두 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고요....

by 이서연

삽질 기록의 자리

지난 화요일 오후, 판교 사무실에서 신입 한 분이 배포 권한 오류를 잡고 있었습니다. 해결 뒤에는 과정을 팀 위키에 남겨 달라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장애나 큰 이슈만 적었습니다. 권한 설정, 로컬 환경 같은 삽질은 슬랙 대화로 끝남. 같은 질문이 세 번째 나온 날부터 온보딩 문서 끝에 칸을 하나 붙였습니다. 처음 막힌 지점 확인한 권한과 설정 아직 애매한...

by 박지훈

금요일인데 월요일을 생각했다

어제 종례가 끝난 뒤, 교실 바닥에 의자 끄는 소리만 잠깐 남았어요. 아이들이 놓고 간 공책 몇 권을 교탁 위에 가지런히 쌓고 알림장을 적으려는데 칠판 한쪽의 받아쓰기 날짜가 눈에 들어왔고, 아직 금요일 오후인데 다음 주가 갑자기 바로 앞까지 온 것 같았어요. 지우개를 들었어요. 날짜는 그대로 두었어요. 알림장에는 준비물부터 쓰면 되는데 월요일 1교시 장...

by 이서연

셔틀버스의 사십 분

지난 금요일, 판교를 빠져나온 퇴근 셔틀에서 저장만 해 둔 온라인 강의 목록을 다시 열었습니다. 분당 쪽까지 사십 분. 출근길에는 회사 메신저와 오늘 할 일을 보는데, 퇴근길에는 이상하게 강의 플랫폼이나 읽기 목록부터 누릅니다. 그날도 백엔드 강의 하나의 목차를 훑었습니다. 재생은 안 했습니다. 대신 온보딩 문서에 달아야 할 댓글이 떠올라 메모장에 두 줄 ...

by 박지훈

문제 읽는 시간을 남기는 법

지난 수요일 5교시, 교실 뒤에 의자를 놓고 앉았어요. 박 선생님 2학년 수학 수업을 참관하던 때였는데, 점심 뒤라 저도 눈이 조금 무거웠어요. 첫 문제가 화면에 떴는데 바로 풀지 않았어요. 박 선생님은 조건에 밑줄만 치게 했고, 설명도 힌트도 없이 스무 초쯤 기다리더라고요. 그 짧은 침묵이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어요. 아이들이 손을 들기 전에는 짝과 표시를...

by 김민준

페다고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