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의 순서
노트북 화면 맨 위에서 커서가 깜박이고 있었습니다. 2학기 둘째 주 화요일 오전, 대전의 대학 강의실에서 첫 과제를 설명하는데 몇몇 학생이 내용보다 제목 칸을 먼저 붙들고 있었습니다. 제목이 정해져야 쓸 수 있다는 표정이었습니다. 한 학생은 빈 문서에 두세 글자를 적었다가 지우기를 되풀이했습니다. 저는 제목을 비워 두어도 된다고 말한 뒤, 오늘 수업이 끝난 뒤에도 머리에 남을 장면 하나만 적어 보라고 했습니다.
처음 강의를 맡았을 때는 독후감, 주장하는 글, 자기소개서를 각각 독립된 과제로 냈습니다. 과제마다 새 주제를 고르고 첫 문장을 만들게 했으니, 학생들은 세 번이나 출발선에 섰습니다. 선택지가 많으면 쓸 이야기도 많아질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반대인 경우가 잦았습니다. 한 편을 겨우 마치고 나면 메모도 버리고 참고한 문장도 닫아 버렸고, 다음 과제에서는 다시 빈 화면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저도 그때는 완성된 글만 첨삭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초고 앞에 놓였던 낙서와 질문은 과제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어느 학기였던가, K 학생이 앞 과제를 준비하며 적은 메모를 버리지 않고 다음 글의 근거로 가져왔습니다. 학생회관 주변을 관찰한 짧은 기록이었는데, 나중에는 학교 안에서 혼자 머물 수 있는 장소가 부족하다는 의견으로 이어졌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벤치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가방 하나가 끝자리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잘 쓴 문장이라서 기억한 것은 아닙니다. 눈앞의 장면이 다음 질문을 데리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 뒤부터 과제를 조금씩 잇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짧은 관찰 기록을 쓰고, 그 기록과 가까운 책의 문장을 옮겨 적고, 두 문장 사이에서 질문을 만든 다음, 자기 의견을 붙이게 했습니다. 매번 새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 첫 문장을 쓰는 시간이 줄었습니다. 제목은 대개 뒤에서 따라왔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순조롭지는 않았습니다. 관찰 기록이 아주 사적인 일기로 흘러가기도 했고, 책에서 옮긴 문장을 한 쪽 넘게 붙여 놓고 자기 말은 두 줄만 쓰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저는 첨삭란에 무엇을 실제로 보았는지, 왜 하필 그 문장을 골랐는지를 따로 물었습니다. 질문을 두 개로 나누면 학생도 고칠 자리를 찾았습니다. 관찰에는 시간과 장소와 움직임을 남기게 하고, 인용 아래에는 선택한 이유를 한 문장이라도 적게 했습니다. 다음 과제를 낼 때는 지난 메모를 다시 펼치는 시간을 수업 중에 두었습니다. 이 시간이 빠지면 과제의 연결은 제 설명 속에만 남기 쉬웠습니다.
이번 학기에는 첫 과제를 잘 쓴 글이 아니라 다음 글에 남겨 둘 재료라고 설명했습니다. AI에 제목과 개요부터 묻기 전에,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장면을 자기 문장으로 적어 두는 편이 낫다고도 했습니다. 그날은 길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과제를 얼마나 잘게 나누어야 하는지 아직 망설일 때가 있습니다. 다만 완성도를 낮추자는 뜻은 아닙니다. 완성에 이르는 순서를 바꾸어 보는 일에 가깝습니다.
다음 문장으로 건너갈 발판을 먼저 놓아 본 적이 있습니까?